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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얼 존스 James Earl Jones (1931-2024)SEE 2024. 9. 13. 11:44
제임스 얼 존스 James Earl Jones 배우가 돌아가셨다. 향년 93세.
이분은 목소리로 유명하시다. 대표적인 예가 Star Wars의 Darth Vader, 그리고 The Lion King의 아빠 사자의 목소리... “Remember...”
이러한 역할 때문에 그는 목소리만으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입지를 다질 수 있었지만, 사실 그는 엄청난 경력을 가진 대배우이다. IMDB에 가보니 대표작으로 Star Wars 외에 Field of Dreams, Jack Ryan 시리즈였던 The Hunt for Red October 등이 나온다. 각 장르에서 뛰어난 이 작품들에서 존스 할아버지는 인종의 장벽을 넘는 (혹은 인종이 주요 요소가 아닌) 캐릭터를 멋지게 연기하셨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 작품들이 그의 작품 세계를 모두 보여주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존스 할아버지를 (아마도) 처음 보고 지금도 그때 받은 깊은 인상을 잊지 못하는 작품은 The Great White Hero (1970)이다. 20세기 초반 실존했던 흑인 권투 선수 Jack Johnson을 모델로 한 이 영화에서 존스 할아버지는 백인들을 모두 때려눕히는 권투 선수이자 백인 여성 Eleanor를 아내 혹은 동반자로 둔 흑인 남성 Jack을 연기했다. 당시 인종 상황에서는 당연히 여러모로 논란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던 Jack은 결국 흑인, 백인 사회로부터 모두 압력을 받게 되고, Eleanor가 자살한 후 원치 않던 경기에 나서서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백인들의 염원대로 패배한다. 영화 제목은 Jack을 무너뜨리고 백인의 자존심을 살려주기 위해서 백인 사회에서 찾던 백인 권투 선수를 의미한다. 백인들을 압도했던 주인공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아이러니한 제목이다.
두 장면이 기억나는데, 하나는 작품 초반, 권투 경기의 한 장면이다. 이때 감독은 백인 선수를 보여주지 않고 관중들의 야유 속에서도 큰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마구 날리는 Jack의 얼굴을 확대한다. 최소한 링 위에서 흑인 Jack이 합법적으로 백인을 마음껏 때리면서 느끼는 쾌감이 얼굴에 그대로 담겨 있다. 다른 하나는 (사실 이 장면이 더 인상 깊었는데) Eleanor가 죽자 Jack이 오열하면서 백인들이 원하는 경기에 응하는 장면이다. 눈물, 콧물이 뒤섞인 채, 절규하던 그의 모습이 (실제 영화를 다시 보면 내가 지금 기억하는 그대로인지는 몰라도) 나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아울러 Eleanor가 자살하러 가는 장면도 어린 마음에 잊기 힘들었던 듯...).
The Great White Hero는 아마도 초등학생 시절 한국 텔레비전 영화 프로그램에서 방영했을 때 본 듯하다. 솔직히 흑백으로 봤는지 컬러로 봤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오래 전 일이다(우리나라 컬러 TV 방송은 1980년에 시작했고, 컬러 텔레비전이 널리 유통된 건 시간이 좀 걸렸다고 알고 있다). 당시 영미권 주요 영화를 접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경로였던 KBS 명화극장, KBS 토요명화, 또는 MBC 주말의 명화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 프로그램으로 통해 어떤 영화가 방영되면 늦은 시간임에도 가능하면 시청하려 했던 듯하다. 하지만 이런 복잡하고 비극적인 작품을 초등학교 시절에 시청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신기할 따름. 그때 존스 할아버지는 너무나 많은 힘과 에너지를 발산하는 젊은 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른 역할을 맡으면서도 무시 못 할 내공의 힘을 보여주셨다. 그래서인지 부고를 듣고 90이 넘은 나이임에도 그가 돌아가셨다는 게 선뜻 믿기지 않았다. 고인의 명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