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전 리영희 선생님께서 타계하셨음.
현대사의 굴곡을 직접 몸으로 받으신 그 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참고 기사 하나: 용기·객관성·양심… ‘만인의 은사’로 남다)
사실 그 분의 글은 많이 읽지 않았던 차에
소위 <전논>이라 불리는 『전환시대의 논리』(1974)(클릭)에 실린 글 몇 편을 봄.
시대적 차이로 인한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정녕 한국사회가 많이 변했는지 생각해보게 됨.
아래는 대중문화 관련 글의 한 대목:
텔레비전 방송시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문화, 연애물이라는 것이 철두철미 부유층 취미의 도시중심적이고 소비문화적인 데도 마음이 개운칠 않다. 어떤 나라에서는 모든 면에서 도시와 농촌의 격차와 단층을 줄이고 메우려는 노력이 하나의 사회원리로 내세워지고 있는데, 우리의 경우는 온갖 문화적 노력이 오히려 그것을 넓히고 깊게 하려는 데 치중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
... 모두가 누릴 수 없는 소수의 문화형식을 마치 그 사회의 무슨 큰 발전인 듯, 전체를 대표하는 듯 제시하려는 의도에는 반감이 앞선다. 한마디로 우리의 텔레비전 문화는 전체 사회를 식민지화한 소수의 식민수혜자의 문화를 대변하는 것 같아서, 그것을 보면서 기뻐지기보다는 슬퍼지니 딱한 일이다.
[...]
나는 [유태인에 대해 유럽인들이 갖는 종류의] 편견을 깨우치고 바로잡는 일의 중요성을 텔레비전 방송에 기대하고 싶다. 너무도 많은 비이성과 편견이 "텔리비전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라는 '매스미디어 기능론'의 허울 밑에 너무도 비판받지 않은 채 수용되고 있는 것 같다. 편견을 깨우치고 이성을 되찾는 사업은, 텔레비전이 점점 더 많은 사람의 사고형성의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는 현실에서 볼 때 텔레비전이 회해서는 안될 임무이겠다.
[...]
악한 것을 악한 것으로, 선한 것을 선한 것으로 그려내는 선전에 이의가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일체를 흑과 백, 천사와 악마로 양단해버리는 식의 선전은 거꾸로 우리 국민의 과학적 사고능력과 이성을 마비시킨다. 또 모든 사물에는 가치체계의 차이에 따라 선악의 기준도 다를 수 있다는 정도의 '자유스러운 사고능력'마저 박탈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와같은 흑백식 사고방식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이 사회와 국민 사이에 사고와 가치관의 획일주의의 굴레를 씌우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아가 어느 사회에서나 지배새력의 가치관과 이념만을 유일한 것으로 대중에게 내리 먹이려는 노력에 봉사할 뿐이겠다.
- 「텔리비전의 편견과 반지성 」(1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