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스터데이 YesterdayGO 2024. 8. 9. 22:31
신촌에서 학생이던 시절, 맥주를 마실 때면 정해진 곳이 있었음. 그중 한 곳을 학과 선생님 두 분께 소개해 드렸는데, 두 분 모두 돌과 목조로 이루어진 고전적인 실내 장식 분위기를 좋아하셔서 그곳에서 같이 술 마신 적이 적지 않았음(이곳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
기억나는 일화 하나. 학부 졸업생 때 한 번은 밤에 그곳에서 같은 과 친구와 술 마시다가 (나답지 않게) 간이 커져 위에 언급한 선생님 중 한 분의 연구실로 전화해 술자리로 초대한 적이 있음. 혼나는 걸 각오했지만 그 선생님께서 흔쾌히 오셔서 같이 술 마시고 술값도 내주신...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추억.
하지만 직장을 가진 후 나의 맥줏집은 오로지 한 곳, 예스터데이 Yesterday (클릭). 이곳도 90년대부터 드문드문 방문했지만(사장님이 다른 분이셨을 듯), 지금의 모습으로 만난 건 교수가 된 이후. 교수 초창기 시절 어리어리해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그랬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그곳에서 인문대 선생님들 4~5분이 정기적으로 혹은 수시로 갖는 술자리에 참석하게 되었고, 이후 한동안 정기적으로 참석함. 나 외에 학과 선생님은 한 분 정도였고, 대부분 인문대의 다른 전공 선생님들. 모두 예스터데이의 단골손님들로 나보다 열 살 혹은 그 이상 연세가 많으셨지만, 나를 직장 동료로서 평등하게 대해 주시고 당신들의 생각을 (아주!) 진솔하게 공유하셨음. 예스터데이는 자정에 문을 닫는데, 이야기가 길어져서 시간을 넘긴 적도 적지 않았음.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봐도 아주 재미있었고, 많이 배웠던 시기.
예스터데이에는 주로 대학 선생님들이 많이 오지만 학생들도 종종 보였음. 특히 학과장 시절 이곳에서 대학원생들과 개강 모임을 했는데, 예상과 달리 대학원생들이 긴 테이블(위 사진의 오른쪽 테이블)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이 와서 자기들끼리 잘 이야기하길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남.-_- 다른 세대이지만 이들에게도 이런 자리가 필요하구나 싶었음.
한 가지 창피한 일화는, 지금은 돌아가신 철학과 이규성 선생님(저서 모음 클릭)이 핵심 단골손님이셨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메뉴판에 없던 <이규성 세트>가 따로 있었을 정도. 다른 세트보다 더 저렴하지만 맥주와 안주가 더 많은...^^ 한 번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가서 <이규성 세트>를 주문했고 잘 마시고 잘 먹었음. 그런데 계산할 때였던가, 사장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심: <이규성 세트>는 이규성 선생님이 계셨을 때만 주문할 수 있어요...^^;;
어느 시점부터 술자리 빈도수가 줄어들었음.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보직을 맡으셔서 바빠지시기도 했지만, 학교의 연구 실적 요구가 한층 강화되어 학교 문화가 바뀌기 시작했음. 교수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맥주 한잔하면서 이야기 나누기가 전보다 어려워짐(그래도 마시는 분들은 계셨겠지만). 나 역시 음주 안 하는 게 더 자연스러웠고, 예스터데이에 일 년에 몇 번 가나 싶게 됨. 예스터데이도 경영이 쉽지 않아서 오랫동안 사장님을 도와주셨던 분이 어느날부터 보이지 않음. 그래서 사장님께서 요리 시간이 더 걸린다고 양해를 구하셨음. 게다가 팬데믹...
예스터데이가 8월 14일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영업하지 않는다는 걸 며칠 전에 우연히 알게 되어 어제 다녀옴. 몇 년 만에 갔는데 언제 가도 똑같은 듯한 그런 분위기. 신촌에서 학창 시절에 선생님들께 소개한 그 맥줏집도 그랬는데, 예스터데이 역시 시간 흐름을 잠시 느리게 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놓이게 하는 느낌. 사장님 내외가 전과 달리 이제는 6시 30분에 문을 여시고, 주말에는 문을 열지 않으신다고 함. 어제도 내가 첫 손님이자 마지막 손님이었음. 그 사이 두 팀 정도 있었는데 일찍 자리를 일어섬. 사장님 내외와 마지막으로 인사할 때, 더 자주 못와서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말씀드림. 이규성 세트 에피소드도 다시 언급함.
삶의 일부가 더이상 현재가 되지 않고 <예스터데이>가 되는 건 다반사임. 추억이 남는다고 하지만, 그 추억을 간직할 사람도 결국 사라지고...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든 과거가 현재의 일부처럼 느껴질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가면 늘 듣는 노래 <예스터데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