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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을 무시한 해석READ 2023. 3. 23. 09:01
영화 도망자(The Fugitive, 1993)는 1960년대 약 5년에 걸쳐 방영된
같은 제목의 텔레비전 시리즈(1963-7)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아내 헬렌 킴블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의사 리처드 킴블이 진범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원작을 몰라도 이 영화 한 편으로 전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영화의 완성도가 높다.
범죄 영화로서 이 작품이 갖는 중요성을 차치하고
뜻밖에 이 영화는 문맥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해석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시카고 경찰은 집에 혼자 있던 헬렌이 총에 맞아 살해된 사건을 수사하면서
처음부터 리처드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그 틀에 맞춰서 결론을 내린다.
즉, 집에 강제 침입 증거가 없고,
바닥에 있던 총, 총알, 집안 구석구석에 리처드의 지문이 묻어 있고,
헬렌의 손톱에 리처드의 목이 긁혔으며
헬렌이 가입한 보험의 수혜자가 리처드이기에 그가 살해자라는 것이다.
이미 부유하고 권위 있는 의사인 리처드가
총은 원래 자신이 소유한 것이고 목의 상처는 헬렌을 옮기다가 난 것이며
무엇보다 집에서 한쪽 팔이 의수인 범인과 마주쳤다고 주장하는 항변은
이미 결론을 정한 형사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
투옥된 리처드는 이감 중 차량 사고가 발생한 틈을 타 탈출하고
이제 연방보안관들이 그를 검거하기 위해 나선다.
이들도 처음에는 당연히 리처드를 범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재수사를 할수록 경찰 수사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결국 연방보안관들은 리처드의 병원 동료이자 친구였던
찰스 니콜스가 범행을 사주한 것임을 알아낸다.
리처드는 니콜스가 개발하고 제약회사에 발주하려던 신약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니콜스는 리처드를 제거하기 위해서 의수를 가진 전직 형사를 고용했던 것이다.
집 안에 외부인 침입 흔적이 없었던 이유는
헬렌이 살해된 날, 니콜스가 리처드의 차를 빌렸는데 차 안에 있던 집 열쇠 덕분이었다.
결국 리처드는 누명을 벗지만, 영화 속에서 해소되지 않는 점이 하나 있다.
법정에서 검사 측이 리처드의 유죄를 확정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하는 것으로
헬렌이 사망 직전 가까스로 911에 전화를 걸어 짧게 발언한 내용이다.
HELEN: He's trying to kill me...
911: Will you repeat that please?
HELEN: He's trying to kill me...
911: Ma’am, is the attacker still in the house?
HELEN: Richard... Richard. He's trying to kill me...
물론 관객은 리처드가 헬렌을 살해하지 않았다는 걸 알지만,
텍스트를 단순하고 표피적인 수준에서 해석하면
Richard와 He를 동일인물로 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수준의 해석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헬렌과 리처드의 관계, 헬렌의 발언 당시 집안의 상황 등과 같은
문맥을 복합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필수이다.
그런 다음에 위 통화 내용을 다시 들어보면,
헬렌이 리처드를 살해범으로 지목한 것이 아니라,
실은 리처드에게 마지막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문맥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통화 내용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 이들은
무고한 시민에게 누명을 씌우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
문맥을 잘 이해해도 해석이 정확하지 않을 가능성이 늘 있는데
하물며 문맥을 무시하고 편협한 세상관에 휩싸여
부분과 전체를 연결시키지 못하는 이들로부터
제대로 된 분석을 기대하기 힘들다.
이들에게는 세상이 단순하고 자기 멋대로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리처드의 이야기는 픽션이다.
하지만 문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부분에만 집착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거나
심지어 왜곡하는 일은 현실에서 낯설지가 않다.
이는 인간과 사회를 텍스트로 삼은
인문학 교육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또 다른 이유이다.
복잡한 문학 텍스트를 배우는 일은
한가하게 뜬구름 잡는 게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구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