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주 오래 전 9월 하순 정도?
운전하면서 불이 훤히 켜진 잠실 야구장 주위를 지나가다
불현듯 가봐야겠다 싶어 방향을 바꿔 입장한 적 있음.
이미 플레이오프 팀들이 결정된 후였고
그 경기도 거의 후반부. 아마도 7회말이거나 8회초?
관중이 적진 않았지만 긴장감을 찾아보기 힘든 여유로운 가을밤 야구장.
이종범 씨가 아직 현역 선수로 1루를 지키고 있었음.
대충 지정석 표 아무 거나 사서 들어가보니
트랜치 코트를 입으신 50대 남성분이 내 자리에 앉아 있었음.
날 보고, 이제 들어오는 사람이 다 있네, 라고 말씀(불평?)을 하시고 다른 자리로 가심.
짐작하건대 그 자리도 그 분의 것이 아닌 듯.
맥주 캔 하나를 들고 투수의 볼 하나하나를 조용히 음미하시는 모습을 보고
야구를 정말 깊이 감상하시는 분이네, 라는 인상을 받음.
최근 1년 만에 야구장 방문.
이제 야구장은 좌석별 가격대가 천차만별.
당연히 선수들을 가깝게 볼 수 있고 테이블석처럼 편한 자리일수록 고가임.
하지만 각 야구장에는 저렴한 가격임에도 일종의 명당 자리가 있고
잠실의 경우, 그런 자리가 있는 블록 중 높은 곳에 앉아 봄.
블로거 몇 명이 이야기하듯 매우 가파른 경사로 등산하는 느낌.
하지만 일단 앉아보니 한 눈에 전 경기장이 눈에 들어오고
사진보다 투수의 볼이 훨씬 가까이 보임.
볼의 높낮이는 가늠하기 힘들지만 코스로 스트라이크/볼 판독 가능할 정도.
야구장 지붕 위로 불어오는 바람에 더위를 식힌 후 주변을 보니
오래 전 트랜치 코트 남성분을 연상시키는 아저씨들이 포진해 있었음.
근처에 열성적으로 응원하던 20대 관객들이 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조용한 곳에 거의 혼자 혹은 두 명 정도 같이 와서
별 말 없이 야구를 음미하고 계셨음.
내 근처에 계신 분 외에 (이 분은 좀 시장하셨던 듯)
대부분 마실 것 하나만 들고 오는 정도.
자리 배치표로 미루어 보아 응원하는 팀을 추측할 수 있겠지만
박수도 거의 안 쳐서 이 분들의 응원팀을 정확히 알아내기는 쉽지 않음.
다만 특정 팀 투수의 좋은 스트라이크 볼이 들어오면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
이 분들에 둘러 싸여 나 역시 몇 시간 동안 한 마디 말 없이 경기에 몰입.
잠시 자리를 비운 것 외에 그렇게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드문 경험.
소리를 계속 지르는 옆 20대 관객들이 보기에 이상한 아저씨 무리들로 보였을 듯...
지상으로(!) 내려와 보니 절대 다수의 관객은 젊은 층.
응원하는 팀에 따라 거침없이 나오는 기쁨과 분노의 말들.
하지만 이내 조용해지는 야구장 주변...
더운 여름날 특유의 끈끈한 공기 맛을 음미한 밤이었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