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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READ 2016. 6. 8. 23:11
이유나 결과가 무엇이든,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 청춘시기의 적잖은 시간을 가져간 생존 작가 중 한 명. 아래는 그의 최근 에세이 책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의 몇 대목. 창작과 공부는 많이 다른 것이지만, 아래 작가의 묘사를 읽다보면 오래 소설 쓰기, 오래 논문 쓰기, 오래 공부하기 사이에는 생각보다 많은 유사점이...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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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쓴다는 것은 아무튼 효율성이 떨어지는 작업입니다. 이건 ‘이를테면’을 수없이 반복하는 작업이니다. 하나의 개인적인 테마가 있다고 합시다. 소설가는 그것을 다른 문맥으로 치환합니다.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치환 paraphrase 속에 불명료한 점,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그것에 대해 ‘그건요,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것이에요’가 끝도 없이 줄줄 이어집니다. 한없는 패러프레이즈의 연쇄지요. [...]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설가란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가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바로 그런 불필요한 면, 멀리 에둘러 가는 점에 진실, 진리가 잔뜩 잠재되어 있다, 라는 것입니다. [...]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효율성이 떨어지는 우회하기와 효율성 뛰어난 기민함이 앞면과 뒷면이 되어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중층적으로 성립합니다. 그중 어느 쪽이 빠져도(혹은 압도적인 열세여도) 세계는 필시 일그러진 것이 되고 맙니다. (24-25)
물론 직업적인 소설가 중에도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되 명석한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세간에서 말하는 두뇌의 명석함뿐만 아니라 소설적으로도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가 본 바로는 그런 두뇌의 명석함만으로 일할 수 있는 햇수는—알기 쉽게 ‘소설가로서의 유통기한’이라고 말해도 무방하겠지요—기껏해야 십 년 정도입니다. 그 기한을 넘어서면 두뇌의 명석함을 대신할 만한 좀 더 크고 영속적인 자질이 필요합니다. 말을 바꾸면, 어느 시점에 ‘날카로운 면도날’을 ‘잘 갈린 손도끼’로 전환하는 게 요구됩니다. 그리고 좀 더 지나면 ‘잘 갈린 손도끼’를 ‘잘 갈린 도끼’로 전환하는 게 요구됩니다. (27)
이를테면, 이건 어디까지나 내 경우가 그렇다는 것인데, 장편 소설 한 편을 쓰려면 일 년 이상(이 년, 때로는 삼 년)을 서재에 틀어박혀 책상 앞에서 혼자 꼬박꼬박 원고를 쓰게 됩니다. 새벽에 일어나 매일 다섯 시간에서 여섯 시간, 의식을 집중해서 집필합니다. 그만큼 필사적으로 뭔가를 생각하다 보면 뇌는 일종의 과열 상태에 빠져서(문자 그대로 두피가 뜨거워지기도 합니다) 한참 동안 머리가 멍해집니다. 그래서 오후에는 낮잠을 자거나 음악을 듣거나 그리 방해가 되지 않는 책을 읽기도 합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아무래도 운동 부족에 빠지기 쉬워서 날마다 한 시간 정도는 밖에 나가 운동을 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의 작업에 대비합니다. 날이면 날마다 판박이처럼 똑같은 짓을 반복합니다. (178-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