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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시절 가장 열심히 공부한 수업 중 하나에서
대학 4년 사상 최악의 학점을 받은 적 있음.
가장 존경하는 교수님들 중 한 분이 담당하셨고, 가장 듣고 싶은 수업 중 하나였음.
강의실에서 답안지를 썼을 때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음.
나답지 않게 종료 전에 강의실을 나오면서 어, 이게 아닌데 싶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
나중에 왜 안 좋은 학점을 받았고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대략 깨닫게 됨.
의욕이 넘쳐 나름대로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몰라도
생각보다 텍스트를 자세히 읽지 않아서, 답안이 상세하거나 깊이가 없었던 듯.
한마디로 열심히 한다는 기분에 들떠서 정작 가장 기본적인 것에 소홀히 했던 듯.
여하튼 한동안 그 교수님을 피해 다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창피함과 더불어
안 좋은 학점을 주신 교수님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수반됨.
때로는 그분의 강의에 대한 불만을 더 떠올리기도 했음.
하지만 많은 것을 배웠기에 오기로 다음 해 같은 수업을 청강함.
마치 재수강하듯이 거의 개근하고 열심히 공부함.
몇 년 후 그분의 대학원 수업을 들었을 때, 좋은 평가를 받음.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어느 시 한 대목을 말씀하시고 누구의 작품이냐고 물으셨을 때
수강생들 중 유일하게 답해 속으로 의기양양했던 것이 기억남. 아직도 어렸던 시절.
현재의 내 수업 수강인원 만큼 혹은 그 이상 많은 수강생들을
나보다 더 훌륭하게 가르치셨을 그분은 예나 지금이나 개인적으로 나를 모르심.
하지만 학생들과 학점 이야기를 하면 난 아직도 그 수업을 떠올림...
학점 공개 후 문의를 보내오는 학생들의 이메일 수가 차츰 증가하는 추세.
전에는 없거나 극소수였지만 요즘은 전체 수강생 수의 5%-10% 사이 해당됨.
답답한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해 모두 답장해 줌.
그렇게 해서 학점은 중요하지만 그들의 능력을 온전히 반영하지는 못하며
더군다나 인생 전체를 휘두를 정도로 대단한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음.
만족하지 못한 학점을 받았다고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면 안되고,
학점에 대한 불만을 터뜨릴 대상이 필요하다면 내가 되어야 함.
그렇게 해서라도 오래전 내가 학점 때문에 가졌던 무거운 마음을 그들이 덜 갖게끔 하고픈 바람이 있음.
학생들에게는 지금 당장 와닿지 않겠지만... -_-
내 학점으로 인하여 마음 상한 이들에게 사진으로나마 칼국수 한 그릇 대접함.
잊을 건 잊고 연말연시를 따뜻하게 맞길 바라는 마음.